[내고향 新풍속도] 농부의 명함
“여기, 제 명함 드릴게요. 연락하세요.”
전남 순천에서 배농사를 짓는 김용화씨(70)의 지갑에는 항상 명함이 들어 있다. 지갑에 명함이 없으면 뭔가 중요한 걸 집에 두고 온 것처럼 허전하기까지 하다. 자신의 이름과 농장명·전화번호가 찍힌 이 명함이 김씨 지갑 속 ‘필수품’이 된 것은 약 20년 전부터다.
“농산물 전자상거래를 막 시작할 때였어요. 홈페이지를 만들고 농장 홍보를 하려다 보니 명함이 있어야겠더라고요. 그때가 아마 2001년쯤인 것 같아요.”
변화하는 시대에 맞추느라 명함 디자인도 서너차례 바꿨다. 처음에는 흑백 글씨에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었는데 지금은 컬러에다 손글씨로 예쁘게 쓴 농장 이름과 사진이 들어갔다.
귀농 6년 차인 ‘신참 오이 농부’ 이기순씨(53·충남 예산)에게도 명함은 필수품이다. 귀농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명함 만들기였을 정도다.
“처음엔 전화번호만 넣었는데 농사에 대한 생각이나 농사법을 바꾸면서 명함도 교체했어요. 제 생각을 좀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명함을 만들고 싶어서요. 명함은 제 얼굴이잖아요. 얼마 전에는 농업기술센터에서 명함 만들기 교육도 수강했어요. 나만의 개성이 있고 독특한 명함을 만들려고요.”
비단 이 둘만의 일이 아니다. 많은 농부들은 요즘 명함을 건넨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흔하지 않던 풍경이다. 50년 배농사를 지어온 김씨의 기억 속에서도 그렇다.
“옛날에는 누가 명함을 주면 그냥 받기만 했지. ‘저는 농부라 명함이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나만 그랬나? 농부들은 다 그랬지. 그때야 다 시장에 출하했으니까 명함이 필요 없었어. 그런데 직거래가 많아지고 체험농장도 하면서 요즘엔 농부들도 명함이 필요해진 거지.”
‘때깔’ 좋은 농산물, 맛있는 농산물을 잘 생산만 하면 됐던 농부들. 하지만 이제는 판매 잘하고, 상품화 잘하고, 농촌체험 기획도 잘하는 멀티플레이어가 돼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농부들의 명함이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상희 기자 montes@nong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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